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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성어 & 잡학사전

훈민정음 해례본 이란?

by twobins 2020.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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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訓民正音)은 조선 제 4대 국왕 세종대왕이 지은 책의 제목, 그리고 그 책에서 해설하고 있는 뒷날 한글로 불리게 된 한국어의 표기 문자 체계를 말한다.

세종대왕이 즉위 25년(1443년)에 직접 창제하여 궁중에 정음청(正音廳)을 두고 성삼문, 신숙주, 최항, 정인지, 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들에게 명하여 해설서 (훈민정음 해례본)을 발간하여 즉위 28년(1446년)에 반포하였다. 훈민정음이라는 말은 '백성(民)을 가르치는(訓) 바른(正) 소리(音)'라는 뜻으로, 독창적이며, 쓰기 편한 28자의 소리글자였다.

 

한글은 1443년(세종 25년) 훈민정음 28자를 연구·창제하고 3년 동안 다듬고 실제로 써본 후, 1446년 음력 9월에 이를 반포하면서 조선 세종은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을 통하여 문자와 천지인을 바탕으로 하는 음양오행의 관계를 설명하였다.

오늘날 남아 있는 훈민정음의 판본 가운데 하나인 《훈민정음 해례본》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과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훈민정음의 판본에는 크게 해례본(한문본), 언해본이 있고, 그밖에 예의본이 있다. 실록본이 있는데, 이는 예의본에 속한다. 이 가운데 완전한 책의 형태를 지닌 것은 해례본이다.

 

해례본은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된 것과 2008년 상주에서 발견된 것 두 부가 존재한다.

간송본(안동본)은 1940년 무렵까지 경상북도 안동군 와룡면의 이한걸 가문에 소장되어 있었다. 그의 선조 이천이 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세종이 하사했다고 한다.

가로 20 센티미터, 세로 32.3 센티미터 크기이다. 표지 2장에 본체 33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표지와 첫 두 엽은 없어진 것을 훗날에 보충한 것이다. 김주원은 남아있는 세번째 엽 뒷면에 《십구사략언해》가 손으로 적혀 있는 점을 토대로 첫 두 엽도 18세기 또는 그 이후 뒷면에 사략언해를 적기 위해 떨어져 나간 것으로 추정했다.

훗날 이것을 입수한 간송 전형필은 한국 전쟁 때 이 한 권을 오동상자에 넣고 피란을 떠났으며, 잘 때도 베개 삼아 잤다고 한다.

상주본은 2008년 8월 상주에 사는 배익기가 집 수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고 공개하였다.

그러나 골동품상을 하는 조용훈이 도난당한 것이라며 주장하여 소송이 오갔다.

민사 소송에서 대법원은 조용훈의 소유권을 인정하였으며, 그는 2012년 5월에 상주본을 문화재청에 서류상으로 기증하였다.

 

이때 이것이 안동 광흥사의 복장유물이 도난된 것이라는 논란이 제기되면서

광흥사가 소속된 조계종이 반발하였다.한편 민사 소송에서 패소한 배익기는 절도 혐의에 대한 형사 소송에서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고 상주본을 기증하는 대가로 1천억 원을 요구하는 등 무리한 요구를 계속하고 있다.

 

상주본은 조선의 음운학자가 남긴 주석이 있으나, 66쪽 중 18쪽이 멸실되고 불에 탄 등 알려진 것과 달리 보존 상태는 나쁘다.

 

훈민정음 언해본은 해례본에 한글 번역이 붙어있는 것을 말한다. 본디 한문으로 되어 있던 해례본 내용에 1459년(세조 5년) 간행된 《월인석보》에 실린 훈민정음의 어제 서문과 예의(例義) 부분을 한글로 번역해 붙여서 〈세종어제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으로 합본되어 있는 것이다.

해례본의 한 종류라 할 수 있지만 편의상 따로 언해본으로 불린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맞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하는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사람이 많으니라
내 이를 위하여,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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